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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제17차 역사문화탐방 안내

작성자 : 수원문화원 날짜 : 06/10/12 17:01 조회 : 3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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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원에서는 살아있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조상들의 발자취를 찾아 매달 문화유적지를 탐방을 하고 있습니다. 제17차 역사문화탐방은 농업을 기반으로 한 관광, 문화, 교육도시로서 전형적인 전원도시이기도 한 전라남도 담양군을 찾아가고자 합니다. 담양군은 예부터 인심좋고 살기좋은 “의향.예향.죽향”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왔으며 교통이 편리하고 자연경관이 수려한 아름다운 숲과 늘푸른 대나무골로, 전국 유일의 대나무 박물과 죽녹원, 담양호권의 추월산, 가마골, 금성산성 등 관광지와 시.가사문학의 면앙정, 송강정, 식영정, 소쇄원 등의 수많은 사림문화 유적지가 있습니다. 이번 제17차 역사문화탐방에 관심있는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 - - 아 래 - - - ?◈ 답사일시 : 2006년 11월 14일(화) 오전 08:00 정각 출발 ?◈ 답사장소 : 전라남도 담양군(소쇄원, 취가정, 환벽당, 식영정) ?◈ 출발장소 : 수원문화원(수원시민회관 주차장) ?◈ 회 비 : 회원 20,000원 / 비회원 30,000원 선납(중식 포함) ?◈ 인 원 : 45명 (선착순 마감) ?◈ 준 비 물 : 카메라, 필기도구 ?◈ 접수 및 문의 : 수원문화원 사무국 ☎ 244-2161∼3 ???★ ★ 역사문화탐방 회비 납부는 계좌이체가 가능합니다. ★ ★ ????( 기업은행 331-000534-01-206 / 예금주 : 수원문화원 ) ?※ 문화탐방 코스는 현지사정에 의하여 변경될 수 있습니다. ▦ 담양 소쇄원(潭陽 瀟灑園, 사적 제304호) ▦ 소쇄원은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 중기의 정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다. 양산보(1503~1557)는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의 정원인 소쇄원을 지었다. 정원은 계곡을 중심으로 하는 사다리꼴 형태로 되어있다. 4.060㎡의 면적에 기능과 공간의 특성에 따라 애양단구역, 오곡문구역, 제월당구역, 광풍각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정원 내에는 대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들로 된 숲이 있다. 주위에는 흙과 돌로 쌓은 자연스러운 담이 있는데 ‘애양단’, ‘오곡문’, ‘소쇄처사양공지려’의 석판과 목판글씨가 담벽에 박혀있다. 소쇄원 안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소쇄원의 모습을 목판에 새긴 그림이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엿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정원이다. ▦ 취가정(醉歌亭) ▦ 충장공 김덕령(金德齡)이 출생한 곳으로서 환벽당 남쪽 언덕 위에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의 혼을 위로하고 그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1890년(고종 27년) 후손 김만식(金晩植) 등이 세웠다. 6·25전쟁으로 불탄 것을 1955년 재건하였다. 주변 정자들 가운데 가장 늦게, 야트막한 산 위에 누대처럼 지었는데, 대부분의 정자들이 강변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과 달리 넓게 펼쳐진 논과 밭들을 향하여 세웠다. 정자 앞에 서 있는 소나무는 정자의 운치를 한결 더해준다. 정자의 이름은 정철의 제자였던 석주 권필(1569∼1612)의 꿈에서 비롯하였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이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고 한맺힌 노래 《취시가(醉時歌)》를 부르자, 권필이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원혼을 달랬다고 한다. ▦ 환벽당(環碧堂, 광주광역시기념물 제1호) ▦ 광주광역시 북구 광주호 상류 창계천가의 충효동쪽 언덕 위에 있는 정자로,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낸 김윤제(金允悌:1501∼1572)가 낙향하여 창건하고 육영(育英)에 힘쓰던 곳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목조와가(木造瓦家)이며, 당호는 신잠(申潛)이 지었다. 송시열이 쓴 제액(題額)이 걸려 있고, 임억령(林億齡), 조자이(趙子以)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김윤제는 광주광역시 충효리 태생으로, 호는 사촌(沙村)이다. 1528년 진사가 되고, 1532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그후 나주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관직을 떠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을 썼다. 그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철(鄭徹)과 김성원(金成遠) 등이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과 김덕보 형제는 그의 종손으로 역시 김윤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히, 정철은 16세 때부터 27세에 관계에 나갈 때까지 환벽당에 머물면서 학문을 닦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환벽당 아래에 있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는 김윤제가 어린 정철을 처음 만난 사연이 전하는 곳이다. 조부의 묘가 있는 고향 담양에 내려와 살고 있던 당시 14살의 정철이 순천에 사는 형을 만나기 위하여 길을 가던 도중에 환벽당 앞을 지나게 되었다. 때마침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꿈에 창계천의 용소에서 용 한마리가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꿈을 깬 후 용소로 내려가 보니 용모가 비범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김윤제는 소년을 데려다가 여러 가지 문답을 하는 사이에 그의 영특함을 알게 되었다. 그는 순천에 가는 것을 만류하고 슬하에 두어 학문을 닦게 하였다. 정철은 이 곳에서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등 명현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웠다. 후에 김윤제는 그를 외손녀와 혼인을 하게 하고 그가 27세로 관계에 진출할 때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환벽당 인근에 취가정, 독수정, 소쇄원이 있다. 환벽당은 정철의 4대손 정수환(鄭守環)이 김윤제의 후손으로부터 사들여 현재 연일 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 식영정(息影亭, 전라남도기념물 제1호) ▦ 식영정은 서하당 김성원이 그의 장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로, 조선 중기 학자이자 정치가인 정철이 성산에 와 있을 때 머물렀던 곳 중의 하나이다. 『서하당유고』의 기록에 따르면 명종 15년(1560)에 지었다고 한다. 김성원은 송강 정철의 처가쪽 친척이며, 송강이 성산에 와 있을 때 함께 공부하던 동문이다. 정철(1536∼1593)은 명종 16년(1561)에 27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뒤로 많은 벼슬을 지내다가 정권다툼으로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내려와 이곳 식영정을 무대로 하여 많은 선비들과 친분을 나누었으며, 시문을 익히고 『성산별곡』 등의 문학작품을 지었다. 식영정은 앞면 2칸·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한쪽 귀퉁이로 방을 몰아 붙이고 앞면과 옆면을 마루로 한 것이 특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