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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제16차 역사문화탐방 안내

작성자 : 수원문화원 날짜 : 06/06/21 10:33 조회 : 3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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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원에서는 살아있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조상들의 발자취를 찾아 매달 문화유적지 탐방을 하고 있습니다. 제16차 문화탐방은 거중기와 녹로(도르래)를 만들어 수원화성을 쌓는 등 여러 업적을 남기고 18년의 유배기간 동안 실학의 대가가 되어 실학의 봉우리를 만들어낸 다산 정약용의 삶과 일대기를 돌아보고, 또한 조선시대 수많은 왕후와 후궁들 중 가장 한 많은 여인인 조선 제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의 삶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회원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 아 래 ▦--------------------------- □ 일  시 : 2006년 7월 11일(화) 오전 08:00 정각 출발 □ 장  소 : 경기도 남양주 ( 다산생가. 홍,유릉, 사릉, 세미원 ) □ 출발장소 : 수원문화원 (수원시민회관 주차장) □ 회  비 : 회 원 월20,000원 선납(중식포함)                   비회원 월30,000원 선납(중식포함) □ 인  원 : 45명 (선착순 마감) □ 준 비 물 : 카메라, 필기도구 □ 접수처 및 문의처 : 수원문화원 사무국 ☎ 244-2161∼3   ★★ 역사문화탐방 회비 납부는 계좌이체가 가능합니다.★★     (기업은행) 331-000534-01-206 (예금주 : 수원문화원) ※ 문화탐방 코스는 현지사정에 의하여 변경될 수 있습니다.※ ▦ 다산 정약용의 삶▦ 다산 정약용은 1762년(조선후기)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정씨 집안은 8대 연속 홍문관 학사를 배출한 적이 있는 집안이었고, 외가는 학문과 예술의 집안이었다. 형제들은 학문적 재주가 있어 실학과 서학(천주교)에 일찍 눈을 떴으나 당시 폐쇄적이었던 시대 분위기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 진정한 참지식인 다산▦ - 엘리트에서 미관말직으로 다산은 평생을 따라다닌 '천주학쟁이'라는 붉은 꼬리표 때문에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는다. 지금에야 조금 덜하지만 남과 북이 치열하게 대립하던 살벌한 냉전시기에 '공산주의자'라는 붉은 딱지가 붙은 사람이 겪었던 그것처럼.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가까이 모시는 비서관으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엘리트 관리이던 다산은 천주교 문제 때문에 하루아침에 지방의 미관말직으로 좌천된다. 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은둔하고 있다가 역시 천주교와 관련된 옥사에 연루되어 한번은 경상도 장기현으로, 한번은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간다. 한 개인에겐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이건만, 다산은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책을 놓지 않으며 학문연구에 전념하는 학자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는다. 28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고,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33세에는 예문관(별칭으로 翰林)과 함께 관리들의 선망의 대상인 옥당(玉堂), 즉 홍문관의 교리 및 수찬벼슬에 올라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뒤이어 경기도 암행어사가 된 데 이어 홍문관 부교리에 올랐으며 화성 축조공사가 시작되는 시기에 맞춰 거중기를 발명했다. 이어 정조 19년(1795) 그는 34세의 나이로 벼슬의 꽃인 정3품 당상관 동부승지에 오르며 엘리트관료로서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그 해 4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謀)가 밀입국하여 북악산 아래에서 천주교를 선교하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천주교신자들을 공격하는 서용보 · 이기경 · 홍낙안 등 공서파(攻西派)의 모함을 받아 7월에는 종6품의 충청도 홍주목 소재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당했다. 품계가 한꺼번에 6등급이나 강등되는 수모를 겪고서 잘 나가는 중앙의 고위관료에서 한미한 지방의 별 볼 일 없는 직책으로 쫓겨난 것이다. ▦ 성호와 퇴계의 학문 연구▦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호조좌랑이 되어 한양으로 벼슬살이 간 아버지를 따라가 거기서 성호의 종손 이가환과 누이의 남편인 매형 이승훈 등 이익의 학문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던 이들을 만나 교유하며 학문에 뜻을 두었던 다산은 부임지인 금정역에서 멀지 않은 온양 서암의 봉곡사에서 성호의 종손인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 1735-1813), 종증손 이재위(李載威) 등 인근의 성호의 후손들과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과 함께 10일간 공자의 학문에 대해 토론하고 또 "박학한 성호 선생님 / 百世의 스승으로 모시리라"하며 평소 흠모하던 성호 선생의 유고를 교정하였다. "성호 선생이 남긴 글이 지금에 와 없어지고 전하여지지 못함은 후학들의 허물입니다"하며 이삼환에게 편지를 보내 유고정리를 제의하고 모임을 주도한 것이다. 단지 한 때 천주교에 관심을 두었다는 것 때문에 반대파로부터 모함을 받아 관직 품계가 여섯 계단이나 떨어져 지방의 한직으로 좌천되고서도 슬퍼하거나 술로 허송세월하지 않고 오히려 거대한 다산학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성호 이익의 유고를 정리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황의 문집인 < 퇴계집>을 열심히 읽고 퇴계학문의 깊은 이치를 조금이나마 이해하였다. < 서암강학기 西巖講學記>와 < 도산사숙록 陶山私淑錄>은 이때의 공부내용을 기록한 저서이다. 관리로서 임무는 소홀히 한 채 억울한 좌천에 낙심하여 기생을 옆에 두고 술로 세월을 보냈을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선생의 이런 자세는 지식인으로서의 참모습이요, 200여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오늘에도 관리들의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 ▦ 홍릉 ▦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민씨의 합장릉으로 사적 제207호로 지정되었으며 남양주시 금곡동에 자리하고 있다. 고종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철종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자 뒤를 이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조대비가 수렴청정하고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총괄하였다. 그 후 고종이 직접 통치하는 친정체제가 이루어지지만 제국주의의 틈바구니 속에서 개화파화 수구파의 대립으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 격변을 겪었다. 1897년에는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후 연호를 '광무'라 하였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하였다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67세로 승하하였다. 명성황후는 1866년 왕비로 책봉되었는데, 흥선대원군과 대립하여 고종의 친정정치를 추진했는데, 고종의 친정 이후에는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여 실권을 행사하였다. 1895년 일본 공사 미우라가 보낸 자객에 의해 45세로 참변을 당해 숨졌다. 동구릉의 숭릉 옆에 묻혀 숙릉이란 능호를 받았으며,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명성황후로 추존되어 청량리의 홍릉으로 이장하였다가 고종이 승하하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홍릉의 능제는 명나라 효릉을 본뜬 황제의 능으로, 종의 제도에 비해 매우 특이하게 조영되었는데, 그 형태를 보면 종래의 정자각 대신 침전을 세웠고 그 앞에 문인석과 무인석을 세우고 이어 홍살문까지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 등의 순으로 석수를 세웠다. 홍릉의 문인석은 금관을 쓰고 있으며 키가 3.85m나 되어 역대 왕릉의 무인석 중에서 가장 크다. 문인석과 무인석 모두 성장을 강조하였으며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18대 현종 이후 보이지 않던 병풍석은 연화목단문을 조각하여 화려하게 봉분을 감싸고 있으며, 난간석 상성 망주석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문인석과 무인석, 석수들이 모두 침전 앞으로 나가 봉분 주위는 침전의 웅장함에 비해 단촐해 보인다. ▦ 유릉 ▦ 조선왕조 마직막으로 조영된 왕릉으로 제27대 순종황제와 순명황후 민씨, 계후 순정황후 윤씨의 합장릉이다. 남양주시 금곡동에 홍릉과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사적 제207호로 지정되어 있다. 순종은 고종의 둘째 아들이며, 1897년에 황태자로 책봉되고, 1907년 즉위하여 연호를 '융희'라 하였다. 즉위 직후 한일협약이 강제로 성립됨에 따라 일제가 국정 전반을 간섭하였고, 마침내 1910년 8월 22일 어전회의에서 한일합병조약이 조인되어 조선왕조는 종막을 고했다. 그 후 1926년 창덕궁에서 춘추 53세로 승하하였다. 순명황후는 여은 부원군 민태호의 딸로 태어나 1882년 11세에 세자빈으로 책봉되고 1897년에 황태자비로 책봉되었으나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1904년 33세로 숨졌다. 용마산 기슭인 성동구 뚝섬의 유릉에 장례 지냈다가 순종이 승하하자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계후 순정황후는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로 태어나 1906년 황태자비로 책봉되고 순종이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될 때 순정황후는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듣고 있었는데, 이때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한일합방을 강요하자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좋지 않다가 결국 숙부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겼다는 일화가 전한다. 일제의 강점 이후 황후에서 왕비로 강등되었고 1926년 순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왕의 아우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1966년 창경궁 낙선재에서 승하하여 유릉에 합장되었다. 유릉은 홍릉과 비슷하게 조영되었는데 문인석과 무인석 등 석물들의 조각이 홍릉보다 매우 사실적이며 개성적이다. ▦ 사릉 ▦ 조선 제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의 능으로 사적 제209호로 지정되었으며 남양주시 진건면 사능리에 소재하고 있다. 정순왕후(1440∼1521)는 조선시대 수많은 왕후와 후궁들 중 가장 한 많은 여인으로,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여 1454년(단종 2) 15세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후 단종을 상왕으로 모시면서 의덕대비로 봉해졌다. 그 후 1457년(세조 3) 사육신의 단종복위 사건이 일어나자 세조는 이를 문제 삼아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영월에 유배시키고, 정순왕후도 부인으로 강봉 되어 궁궐에서 추방당했다. 단종이 죽자 홀로 된 왕후는 동대문 밖 숭인동의 동망봉에 아침, 저녁으로 소복하고 올라 단종이 묻힌 장릉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고 하며, 세조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으로 여생을 때 묻히지 않고 살았다 한다. 1521년(중종 16) 82세의 일기로 승하하자 중종이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지냈는데 후사가 없었으므로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의 시집인 정씨 집안의 묘역에 묻혔다가 1698년(숙종 24) 단종이 복위되면서 정순왕후로 추봉되어 종묘에 신위가 모셔졌고 능호를 사릉이라 하였다. 사릉은 대군부인의 예로 장사지낸 뒤 나중에 왕후의 능으로 추봉되었기 때문에 다른 능들에 비해 조촐하게 꾸며졌다. 능 주위가 소나무 숲으로 둘러져 있어 전체적으로 아늑하고 단아한 느낌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