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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벗고 삼십리

작성자 : 수원문화원 날짜 : 20/12/08 14:13 조회 : 1028

발가벗고 삼십리

흔히 수원 사람을 일러 깍쟁이라 한다. 어찌된 연유인지는 모르나 ‘수원사람 발가벗고 삼십리 뛴다’는 말을 공공연히 들먹이면서 말이다. 그런데 기실 그 사연을 살피면 깍쟁이라 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그 본질적 내용이 변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고 수원사람을 깍쟁이라 할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도 또한 아니다.

개성사람과 수원사람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그도 그럴 듯 하다. 필자가 수원사람은 깍쟁이가 아니다고 밝히고 주장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적어도 잘못된 근거나 사실에 대해 바로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발가벗고 삼십리’ 설화의 무대가 되는 곳은 화성시의 병점과 수원의 축만제다. 두 지역간의 거리가 약 삼십리가 된다고 한다.

병점을 우리말로 풀면 떡전거리로 떡전거리에 살던 한 양반이 발가벗고 뛸 수밖에 없었던 사연은 이렇다.

옛날 수원 도성에서 30리쯤 떨어진 떡전거리에 양반집 자손인 한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평소에 조상의 산소를 잘 관리하고, 부모님에게도 효성이 지극한 선비였다. 그러한 까닭에 고을에서는 비록 그의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나긴 했지만 ‘본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아오던 터였다. 엄한 가풍으로 생활에 있어서도 절제를 하던 그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도 친구들의 권유에 못 이겨 기방 출입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수원부중(水原府中) 축만제(祝萬堤)가의 행화촌(杏花村=술집)에서 기생의 아리따운 자태에 취해 술을 마시다 보니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잠결에 생각하니 그날이 선친의 제삿날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지 못할 불효를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다급한 마음에 의관도 갖추지 못하고 뛰기 시작해 가까스로 자정을 넘기지 않고 집에 도착하여 아버지의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선비된 자가 의관을 갖추지 못하고 뛰었으니 발가벗고 뛴 꼴이 된 것이었다. 그러니 이 설화의 내용으로 살필 때 깍쟁이라는 말과는 사뭇 거리가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와전되어 이렇게도 전한다. “간장 항아리에 파리가 빠졌다가 날아갔는데, 그를 잡기 위해 발가벗을 채 삼십리를 뛰어갔다.”는 식으로 전하기도 한다. 그래 결국 그 파리를 잡아 다리에 무든 간장을 빨아먹더라는 것이다.

이에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개성사람과 수원사람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들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한다. 우연히 개성 사람과 수원사람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길을 갔다. 두 사람 모두 짚신이 닳을까봐 짚신을 허리에 차고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맞은 편에서 사람이 오자 짚신을 신었다. 개성사람은 신을 신고 몇 걸음 걸어가다 다시 신을 벗었다. 그런데 수원사람은 신을 신고 두리번거리며 움직이질 않고 사람이 지나자 다시 벗었다.

또 한 이야기가 있다. 6.25 때였다. 수원사람과 개성사람이 피난을 가다 빈집에 들어 하루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바람이 심하여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개성사람은 풀을 사고 수원 사람은 문풍지를 샀다. 개성사람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수원사람은 보이지 않고 문풍지 역시 떼어간 뒤였다.

어느 편에서 보느냐에 따라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 인색하다고 보면 더 없이 인색할 것이지만 생활이 규모가 있고 알뜰하다는 편에서 보면 또한 더 없이 알뜰한 것이다. 그래 개성이나 수원 여자를 집안에 들이면 ‘살림은 틀림없다’고 전하는 말은 이를 뒷받침하리라 여긴다.

아무튼 ‘발가벗고 삼십리’를 통해 수원사람이 깍쟁이라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다른 세 편의 이야기도 너나 없이 먹고살기가 급급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버려지는 음식물이 년 7조원에 달한다 하니 차라리 그 인색함? 알뜰함이 그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