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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천동 역말

작성자 : 수원문화원 날짜 : 20/12/08 15:36 조회 : 1046

원천동 역말 서낭제, 우물제사

역말은 현재 원천동 1번지 일대를 일컫던 마을로 아주 대학교 병원 동쪽과 법원, 검찰청 주변에 위치해 있었다. 역말이란 이 곳에 역(驛)이 있었다 붙여진 이름으로 역촌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1793년 화성이 유수부로 승격될 당시는 장죽면에 속하여 장죽역말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 마을엔 마을의 번영과 주민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제사로 서낭제와 우물제사가 있었다고 하며, 마을제사가 이루어지던 시기에 가구수는 대략 50여 세대정도였다고 하며, 마을제사가 단절된 지는 40여 년이 되었다고 한다. 제의 장소는 현재의 약수터 뒤편에 산신을 모신 제당이 있었다.

이엉으로 지붕을 얹었으며, 내부에는 특별한 신체(神體)는 없었고 다만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던 제기 및 떡 시루가 있었지만 6.25전쟁 때 없어졌다. 방울재 쪽에는 서낭당이 있었는데 수백 년 된 큰 잣나무를 신체로 모셨고, 마을 내에도 현재의 교회 쪽에 또 하나의 서낭당이 있었다고 한다. 제의는 봄에 행하여졌는데, 먼저 봄이 되면 2.3월에 날을 잡아 제관을 선출한다. 제관은 마을 대동회에서 추천하여 뽑는다.

대체로 마을에서 주요한 성씨였던 배씨. 고씨. 정씨들 가운데 원로들이 담당하였다. 매년 다른 사람으로 번갈아 맡았으며, 대체로 큰일이 닥치면 원로 중 아무개로 의견이 모아진다고 한다. 제관이 되면 한 3일간은 비린 것을 먹지 않고 몸을 깨끗이 하며, 부부간 동침도 금한다. 마을사람들 역시 이러한 금기를 따른다. 제관은 오로지 제사를 주관할 뿐이며, 제수의 마련 등 모든 준비는 마을의 대표가 알아서 한다. 제물은 보통의 기제사 때와 동일하였다. 제수를 마련할 때 사용하는 물은 제당 바로 아래 있던 웅덩이의 물을 깨끗이 쳐내고 그 물을 사용했다.

제사 당일 한 밤에 산제당에 먼저 제를 올리고 축문을 읽으며, 동네가 평안할 것을 기원한 후 각 집마다 개인 소지를 올려 준다. 제의에는 마을사람들 가운데 깨끗한 사람들은 누구나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산제(山祭)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두 곳의 서낭당에도 간단하게 제물을 차리고 제를 올렸다.

한편 역말에서는 봄에 행하는 또 다른 제의로서 정제(井祭)가 있었다. 이는 마을의 공동우물을 깨끗이 쳐내고 정갈하게 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인 동시에 마을사람들을 위한 잔치의 성격을 갖는다. 마을 계취를 열어 우물의 청소와 수리를 의논하고 날을 골라 소를 잡는다. 경비는 각 집마다 필요한 양만큼의 소고기 값을 내는 것으로 충당하며, 제가 끝난 후 주문한 양의 고기를 분배받아 가져가는 것이다.

이 때 두레패가 풍물을 신명나게 잡히고 놀았다. 정제는 우물에 간이 수도가 만들어진 후로 사라졌다. 마을의 제사가 사라진지 이미 오래이니 그 축문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지역의 문화와 전통에대한 발굴과 연구에 남다른 노력을 기우려오던 김우영(수원시사 편찬위원)에 의해 당시의 축문이 재구되었다.

김우영은 역말 서낭제가 단절된 지 40여 년이 지난 뒤 지역의 고로(古老)들을 일일이 방문하여 그들의 단편적인 기억의 편린을 모으고 엮어 역말 서낭제 축문을 재구(再構)하여 복원하였다. 그 축문의 내용은 이렇다. 역말 서낭제 축문(祝文) 유세차 ○○년 3월 ○일 경기도 수원시 원천동 역말 주민일동 역말 서낭당 치성제사를 드리며 천지신명께 감히 고하나이다. 역말 산신과 마을 토지신, 천지신명께서 예로부터 살기 좋은 이곳 역말을 세세년년 보살펴 주시어 천기와 지기가 만나는 기름진 골을 이루게 하시고, 좋은 우리이웃 사람들 모여들어 오순도순 의좋게 살게 하시고, 마을을 이루어 평화롭게 부유하게 살 수 있도록 하셨으니, 사람들이 이곳을 일러 길지와 명당이라 칭하도다. 그 덕이시여, 인간. 육축. 오곡백과가 한결같이 무병 풍성하도록 도우시니, 어찌 우리가 천지신명께 성스러운 제사를 올리지 않을 수 있으랴. 오늘 길일을 택해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한 이곳에서 온 마을사람 모여 영험하신 신령님께 작은 정성으로 치성을 올리며 고하오니 흠향하소서. 우리마을 길이길이 보살펴 주시길 천만번 엎드려 비나이다.

한 지역의 문화와 전통이 그 존립의 여건과 환경이 변화된 상태에서 그 맥을 이어가기란 실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김우영 선생과 같이 지역의 문화와 전통을 충심으로 사랑하는 이들의 노력과 애정에 의해 복원될 여건이 마련된다는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