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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설화

간촌이생원

작성자 : 수원문화원 날짜 : 20/12/08 13:10 조회 : 1058

2002. 4. 8일 화성의 숨결을 찾아서

간촌 이생원의 벼락과거

김용국

간촌 이생원의 벼락과거라는 이야기가 있다.

간촌이 지금의 어디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정자동의 새터말. 신기(新基)를 새로 생긴 마을, 터를 뜻하는 사잇말, 즉 간촌(間村)으로 보는 이도 있으나 이는 전하는 이야기와의 관련을 생각할 때 수원비행장 아래 동(洞)인 대황교동에 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14년 4월 1일 일제의 의한 수원군의 동리 명칭 및 구역 변경 때, 대황교와 간촌을 합쳐 ‘대황교리(大皇橋里)’라 하여 안용면에 편제되었다는 기록으로 알 수가 있다.

이 지역이 전하는 이야기와 공간배경이 부합되는 까닭이다.

'간촌이생원의 벼락과거‘에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정조대왕께서 그 아버님이신 사도세자의 산소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모시고 난 후의 일이다. 어느 날, 변복 차림으로 능 근처를 돌아보았다. 어떤 농부가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나가다 담배 한 대 같이 피면서 길도 묻고 이런 저런 소리도 하다가, “저 위 저거 무어를 하는 데냐?” 고 아버지 산소인줄 뻔히 알면서도 시치밀 딱 떼 놓고 “저게 뭐냐?” 고 하니까 그 농부가 하는 소리가, “여보, 당신 보아하니 차림새하고 선비가 틀림없는데 그것도 모르느냐?” 고 하였다.

“여기 도대체 뭐 하러 왔는데 그것도 모르고 여길 왔느냐? “아 난 정말로 모른다.” “뭐 하는 데냐?” 하니까, 농부는 그제야 이 사람이 정말로 모르는 사람이로구나 하고,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왕의 아버지로 억울하게 뒤주에 갇혀 돌아가신 뒤주대왕의 능으로 추존을 하여 왕이 되어야 하는 분인데 신하들이 반대를 해서 왕이라고는 못하고 애기능이라 부른다는 것이었다. 신하들도 자신의 말을 반대하는 판에 일개 농부의 이야기는 정조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그래 이 얘기 저 얘기 끝에..., “공부나 좀 했느냐?”고 하니까, “아 글은 좀 읽었고 과거도 봤는데 매번 낙방만 했다.” 하니까, 정조께서 “아, 여기 오는 길에 보니까 과거본다는 방이 붙었습디다.” 하니까 이 농부가, “아 난 못 보았는데요.” “아니요. 나 지금 오다 막 봤는데 방이 붙었습디다.” 하니까 농부가 하는 말이, “그러면 한번 가 볼까요?” 하니까 옆에서 정조께서 권하는 말이 “가 보시오.” 하니, 농부가 말을 받아, “그럼 가보지요.” 그래서 간촌의 농부는 과거를 보러 가기로 했다.

정조께서는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방을 냈다. 어차피 간촌의 농부를 위한 과거이니 전국에 방을 낼 것도 없었다. 수원 근교에만 방을 붙였다. 방을 보고 과거를 보러오는 이가 있었으나 제목은 ‘어느 간촌이생원과 어느 선비와의 대화 내용’을 쓰라는 식의, 그러니까 간촌의 농부만이 잘 알만한 글제가 나온 것이다. 그러니 간촌의 이생원만이 과거에 합격한 것이다. 그래서 간촌 이 생원의 벼락 과거란 말이 생겨났다.

물론 현실적으로 있기도 어려운 일이고 있어서도 안될 일이다. 어느 특정인을 선발하기 위해 문제를 출제하거나 시험을 시행했다니 말이다. 그러나 이는 정조께서 얼마나 아버지이신 사도세자를 그리워하였으며 자식의 도리를 다 하고자 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일화일 뿐이다. 그러니 현실의 잣대만으로 평가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조의 행위가 정당화 될 수 있다는 의미도 아니다. 적어도 어떠한 경우에라도 원칙은 지켜져야만 하며 그 원칙하에서 질서가 바르게 잡힐 수 있음을 반증하는 일화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