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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시발복

작성자 : 수원문화원 날짜 : 20/12/08 13:25 조회 : 940

2002. 6.24 화성의 숨결을 찾아서

금시발복(今時發福) 자리

김용국

이 이야기 역시 정조의 효심을 말하고 있다. 한편 정조께서 백성을 아끼시는 마음 또한 남달랐음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옛날에는 조상의 묘를 백 리(百里)이상의 밖에는 쓰지 않았다. 백 리가 넘으면 영혼이 못다닌다고 해서 그랬다고 한다.

정조께서 부위에 오르시고 여주에 있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찾았다. 아버지의 묘소를 보니 자식의 도리가 아니었다. 초라할 뿐 아니라 서울에서 백 리가 넘으니 천장을 해야 했다. 그래서 당대 유명한 지관인 박상희와 동행을 해서 보시고는 어디 좋은 자리를 찾아보라 명하셨다.

그래 박상희가 강원도 쪽을 둘러보았으나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래 수원쪽으로 가보기로 하였다. 동작나루를 배로 건너 과천으로 접어들었다. 그 때 산꼭대기에서 장사를 지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조께서는 “야, 저기 모이 자리가 어떤지 우리 한 번 가보자.” 올라가서 산소자리를 보니, 한 금정만 올렸으면 아주 참 좋은 자리인데, 한 금정을 내려썼다고 지관인 박상희가 말하니, 정조께서, “그럼 상주(喪主)를 불러라.” 상주를 보니 떡거머리 총각이었다.

“그래 이 한 금정만 올려 쓰면 좋은 자린데 왜 한 금정을 내려썼니?” 하니까, 상주 말이 “제가 사는 곳은 안산입니다. 저는 어머니하고 단 두 식구로, 머슴살이를 해서 먹고 살아갔는데, 그동안 먹고사느라 모아둔 돈이 없었습니다. 막상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나니 어디 산소로 쓸 땅이 없고 구할 형편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안타깝게 생각하여 도움을 주셔서 산소를 쓰는 거라 더는 도움을 청할 수 없습니다........”

정조께서 상주의 말을 채시면서, “그래 누가 이 자리를 잡아주었느냐?” 하시니까 “마을의 지관입니다.” 정조께서 “그 지관의 이름이 무엇이냐?” “성이 박씨인지 홍씨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시(午時)에 하관을 하면 금시발복(今時發福) 자리라 했습니다.

“ 정조께서 말을 들으시고, 쌀 열 가마에다가 베 스무 필을 하사하셨다. 그러시면서 산소를 올려 쓰라고 하셨다. 그러고 나서 생각하시니 총각에게 ‘금시발복자리’라고 그 곳에 묘를 쓰라고 한 지관도 보통지관이 아님이 분명했다.

정조께서는 ‘그 시골 지관을 데리고 오라’ 명하셨다. 총각에게 금시발복자리를 일러준 시골 지관이 도착하자, 시골 지관과 박상희를 보시면서, “이 제 두 사람이 서로 의견을 내어 좋은 자리를 찾아보도록 하라.”명하셨다. 그렇게 하여 잡은 자리에 사도세자의 능은 와우형(臥牛形)이라 주위를 소머리 형상으로 만들었고, 그 뒤 정조께서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으로 잡아 방죽을 만드셨다고 한다. 정조께서 잡으신 자리는 신라시대의 암자터로, 암자를 지금의 용주사 자리로 옮기시면서 나라절로 만드셨다고 한다.

한편 나라에 효자가 너무 많이 나면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진다고 하여 신라시대의 암자를 지금의 용주사 자리로 옮겼다고 하기도 한다. 물론 전한다는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으나, 효자가 많이 나면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진다거나 하는 말은 생각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는 아마도 때 아닌 역병으로 사람이 죽어나간다거나 혹은 가난하여 부모공양이 어려워 신체의 일부를 훼손하여 효를 행하였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아무튼 효행의 방법은 그 시대적 상황에 따라 개인의 사정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러니 효자가 없는 세상보다야 효자가 넘쳐나는 세상이 더욱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효라고 하면 어떤 형식과 틀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아마도 그간 전하여 오는 효행담이 우리도 그렇게 그러한 방법으로 효를 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으로 다가오기에 그러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각자의 처지와 입장에 맞게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 하자는 마음과 실천이 따른다면 그것이 바로 효가 아닐까 한다.